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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각장애인복지의 뿌리를 찾아서....
밝은얼굴
2017. 5. 13. 11:10
한국사회복지사협회가 발간하는 ‘Social Worker’ 2017년 5월호
"한국 시각장애인복지의 뿌리를 찾아서" 이용교/ 광주대 교수, 복지평론가
장애인은 15가지 유형이 있고 그 수준이 다양하다. 최초 장애인복지법인 심신장애자복지법은 장애인의 유형을 지체장애인,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정신지체장애인(현 지적장애인)으로 분류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장애인복지는 시각장애인 분야에서 시작되었다. 이 글에서는 시각장애인복지의 뿌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사회복지의 뿌리를 찾다보면 조선시대 말에 온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감리교선교회 선교사인 Rosetta Sherwood Hall은 시각장애인의 교육과 복지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1865년 뉴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사 자격을 취득한 후 교사로 일했다. 1889년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뉴욕 빈민가에서 자원활동을 하다가 남편이 될 William Sherwood Hall을 만났다. 그녀는 1887년에 설립된 여성병원인 보구녀관(保救女館,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병원)에서 1889년 10월부터 진료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1892년에 결혼하고, 남편은 평양선교기지 책임자로 일하게 되어 떨어져 살았다. 1894년에 남편이 평양에 병원을 개설하자 그녀도 평양으로 갔다. 1893년 2월에 홀여사는 김창식의 명의로 집을 사서 교회를 시작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평양에서는 기독교인 박해사건이 일어났다. 그녀가 시각장애인의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평양에서 자신의 첫 신자인 오석형의 딸 오봉녀가 시각장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홀여사는 오봉녀를 가르칠 방법을 구상하였지만, 1894년에 청일전쟁이 일어나서 그녀는 평양에서 서울로 철수하였다. 그해 11월에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자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홀여사는 1897년 2월에 남편의 유산과 친지들의 조의금으로 평양에 기홀병원(記忽病院)을 설립했다. 그녀는 뉴욕맹인원에서 점자를 다시 배우고, 조선으로 되돌아와서 1897년 11월부터 보구녀관에서 일했다. 1898년 5월에 평양으로 파송된 홀여사는 딸 Edith Margaret의 죽음을 맞이한다.
홀여사는 1898년 6월 18일에 여성치료소인 광혜의원(廣惠女院)을 개설하였는데, 그 병원의 한 방에서 오봉녀에게 맹교육을 실시하였다. 이것이 이 땅에서 근대적 시각장애인교육의 출발이었다. 그녀는 죽은 딸을 추모하여 1899년에 지은 ‘에디스 마거릿 어린이 병동’에서 시각장애소녀를 위한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녀가 시각장애인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아들 셔우드 홀이 쓴 ‘닥터 홀의 조선회상’에서 볼 수 있다. 홀여사는 ‘뉴욕점자’를 한글에 맞게 고친 점자로 조선어 기도서, 십계명 등을 가르쳤다. 빳빳한 기름종이를 잘라서 카드보드처럼 만들고, 여기에 바늘로 점자를 찍어 점서를 만들어서 시각장애인에게 선교한 것이다.
1905년에는 뉴욕 자선가 Clocke부인의 후원을 받아 교사를 신축하였다. 시각장애소녀들은 낮에는 정진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밤에는 어린이병동에서 기숙하였다. 1906년에 맹여아는 7명이었는데, 그중 3명은 평양에서 통학하고, 나머지 4명은 어린이병동에서 기숙하면서 여름방학에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교육방법은 1학년과 2학년은 별도 학급에서 가르치고, 3학년부터 6학년까지는 일반 아동들과 같은 교실에서 통합으로 가르쳤다. 장애아동에 대한 기초교육은 특별학급에서 이루어지고, 3학년부터는 통합교육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교육내용은 보통학교 교육과정을 따르고, 추가적으로 이들이 직업능력을 습득하도록 했다. 교과목은 일본어, 수신, 산술, 조선어 등에 침안(鍼按: 침술과 안마), 창가, 공예 등이 추가되었다.
기숙사에서도 바느질, 뜨개질, 요리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쳤다. 이들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아동 환자를 돌보거나 청소 등 가사를 하고, 토시, 장갑, 침실용 슬리퍼 등을 뜨개질하였다. 이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반지나 예쁜 휘장을 만들어 판매하여 용돈을 벌기도 했다.
학교의 재원은 설립자 출자금으로 운영하다가 1916년경에는 한국내 다른 교회의 보조금과 기부금을 받기 시작했으며 1929년부터 관청의 보조금을 받았다. 교육비는 학교가 부담했지만, 식비는 학생당 월 4원을 부모가 내고, 부담능력이 없는 자는 면제받았다. 1938년에 평양애린원이 발간한 ‘애린’의 평양맹아학교에 관한 기사를 보면, “이 학교의 경비는 1년에 약 오천원인데, 궁내성 하사금이 삼백원, 총독부에서 오백원, 평양부에서 백원, 설립자가 천원, 미국교회 천원, 유지가의 보조금 천원, 조선교회 삼백원 등이 모여서” 운영된다고 하였다.
남자 시각장애인을 위한 맹학교는 1904년 A.F. Moffet부인에 의해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이 학교는 1915년에 홀여사가 운영하는 맹아학교에 흡수되었다. 1917년 홀여사가 보구녀관 후신인 동대문부인병원으로 옮긴 후에는 H.P. Robbins가 교장으로 일했다. 1927년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고등학교 인가를 받고 기숙사를 신축하였다.
한편, 일제는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에 이필화가 사재를 투자하여 운영하던 경성고아원을 빼앗아 제생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본디 제생원은 조선 태조 6년(1397)에 의방(醫方)의 조사와 수집, 의학서적 간행, 약물의 조사와 채집, 의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었다. 일제는 1912년에 제생원에 고아를 양육하는 양육부, 맹아를 교육하는 맹아부, 정신병자를 구료하는 의료부를 두었다. 제생원 맹아부는 일제하에서 맹아교육을 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913년부터 제생원 맹아부에서 일한 박두성 선생은 프랑스인 Braille이 ‘석점 두줄’로 만든 알파벳드 점자가 1878년에 각국 맹인교육자들이 두점으로 만든 뉴욕포인트(뉴욕점자)보다 과학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당시 홀여사가 사용한 한글점자는 뉴욕포인트를 활용한 것인데, 박두성은 초성 열넉자는 석점씩과 중성 열한자는 두점씩으로 정리한 ‘훈맹정음’을 제안하고 사용자들의 실험과 평가를 반영하여 1926년 11월 4일에 훈민정음 반포 8회갑에 한글점자 신안을 공표하였다. 홀여사와 박두성 등 선각자들은 시각장애인에게 점자교육과 침술, 안마 등을 가르쳐 경제적·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셔우드 홀(김동열 역), 닥터 홀의 조선 회상, 동아일보사, 1984.
한국시각장애인복지재단, 한국맹인근대사, 2004.
***http://blog.daum.net/gracepyj/610
에서 [남편과 로제타홀과 그의 아이들] 사진을 활용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