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최흥종과 구라행진 그리고 국립소록도병원

밝은얼굴 2015. 6. 21. 21:18

최흥종과 구라행진 그리고 국립소록도병원

 

이용교/ 광주대학교 교수, 광주광역시사회복지사협회 회장

 

오랫동안 한센병은 천형(天刑)으로 여겼고, 한센병자들은 ‘문둥이’로 불리며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멸시를 받아서 구걸하며 다리 밑에서 살았다. 1909년 광주는 한센병자들의 천국으로 바뀌었다. 광주 제중원의 오웬 선교사가 갑자기 질병이 걸려 목포에 있는 의사 포사이트 선교사를 불렀는데, 그는 광주 근처인 효천에서 길섶에 웅크린 한센병자를 나귀에 태워왔다.

 

제중원 환자들이 한센병자와 함께 치료받기를 거부하자, 벽돌을 굽던 가마터에 그녀의 거처를 마련하여 치료했다. 이 소식은 전국에 퍼져 광주면의 인구가 1만명 가량일 때 한센병자만 600여명이 몰려왔다. 물밀듯이 몰려온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최흥종은 자신의 땅을 기부하여 ‘광주나병원’을 건립하도록 했고, 선교사들을 도와 한센병자를 치료하며 자립하도록 지원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한센병자의 씨를 말리기 위해 ‘단종’(거세)을 실시하였다. 이에 1933년 최흥종 목사와 제중원 간호사인 서서평 선교사는 한센병자 150여명과 함께 비인도적인 단종을 폐지하고, 적절한 치료와 자활을 위한 공간을 요구하기 위해 광주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구라행진(求癩行進)을 했다. 이들은 신작로(국도 1호선)를 따라 우마차에 가제도구를 싣고 광주에서 출발하여 장성- 정읍- 완주- 익산- 논산- 공주- 천안- 평택- 수원- 남태령- 서울로 가서 총독부에서 총독 면담을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하였다. 당시 전국에서 모인 한센병자가 510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최흥종 등은 우가끼 총독으로부터 단종폐지와 ‘소록도갱생원’의 확장을 약속받았다. 소록도에는 한센병자를 위한 소규모 자혜의원(현 국립소록도병원)이 있었는데, 이를 키우고 대규모 갱생원이 설립된 것은 구라행진의 결과이었다. 구라행진은 마틴 루터 킹이 흑인의 참정권 확대를 위해 워싱턴에서 대행진을 한 1963년보다 30년 앞서 식민지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구라행진은 세계사에 빛나는 복지운동이었지만 그 희생이 컸다. 최흥종 목사와 함께 구라행진을 기획하고 한센병자를 간호했던 서서평 선교사는 후유증으로 1934년에 서거했다. 그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광주시민은 최초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작성 2015. 6. 21. lyg29@hanmail.net ] 최흥종과 구라행진.hwp

최흥종과 구라행진.hwp
0.03MB